
전투의 흐름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왕 필립 6세는 제노바의 용병 3천 명을 고용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이 용병들은 석궁을 사용하는 전사들로, 당시 유럽에서 유명한 무기였다. 석궁은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지만, 장전 시간이 길어 잉글랜드 군의 빠른 화살 공격에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잉글랜드 군에는 약 7천 명의 장궁병이 있었고, 이들은 언덕 위에서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화살을 쏘아댔다. 제노바의 용병들은 이러한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전투 전 비가 내린 것은 그들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습기로 인해 석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자, 결국 용병들은 전장을 포기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군의 사령관은 이 상황을 목격하고, 용병들이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랑스 기사들은 오히려 그들의 동료가 공격당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멈추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러나 비가 내린 뒤 언덕 아래는 진창이 되어 말들이 무너지고, 프랑스 기병들은 잉글랜드 보병들에게 쉽게 먹잇감이 되었다. 이 결과로 잉글랜드는 압승을 거두었고, 프랑스는 4천 명 이상이 사망하는 참담한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크레시 전투의 승리는 잉글랜드 군의 사기를 높였고, 에드워드 3세는 다음 목표로 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인 깔레를 설정했다. 깔레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잇는 중요한 거점으로, 에드워드 3세는 이를 통해 프랑스 침공의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깔레 시민들은 잉글랜드의 공격에 강력히 저항했지만, 결국 승기를 잡은 잉글랜드 군은 도시를 점령하고 많은 전리품을 가져가게 된다. 하지만 두 나라는 흑사병의 유행으로 인해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일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모두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1355년, 흑사병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잉글랜드 군은 다시 프랑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에드워드 3세가 아닌 그의 아들인 '흑태자'가 군을 이끌었다. 흑태자는 강력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고, 전쟁터에서의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반면 프랑스의 왕 장 2세는 기사도의 정신을 중시하는 인물로, '좋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인물의 대립은 전투의 양상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
흑태자는 보르도를 시작으로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무려 1천 킬로미터를 행군하며 수많은 마을을 약탈했다. 그의 공격은 잔혹하였고, 프랑스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나라는 다시 한 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고, 각국의 군사적 긴장감은 고조되었다. 흑태자의 약탈 행위는 프랑스 군에게 도발로 작용했으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크레시 전투와 그 이후의 사건들은 중세 유럽의 군사적 전환점을 나타내며, 전술과 전략의 변화, 그리고 인물 간의 대립이 어떻게 전쟁의 양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흥미로운 주제가 되고 있다. 전투의 결과와 그에 따른 정치적 변화는 두 나라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 백년전쟁의 전개에 있어 중요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와 패배를 넘어, 인간의 욕망과 정치적 계산이 얽힌 복잡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