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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년 9월,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다시 한 번 피할 수 없는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인간은 동물인가? 2025. 3. 27. 22:11

1356년 9월,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다시 한 번 피할 수 없는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번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흑태자가 이끄는 군대는 약 7천 명에 불과했지만, 프랑스의 왕 장 2세는 그 두 배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다. 그러나 장 2세는 아버지 필립 6세가 크레시 전투에서 대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술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그는 보병 중심의 전술을 채택하여 말에서 내린 채 전투를 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결정은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보였지만,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잉글랜드 군은 이번에도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언덕으로 가기 위해서는 군데군데 발이 빠지는 습지를 지나야 했다. 기사들은 기사도 정신에 충만해 있었고, 적이 눈앞에 보이자 그들은 달려가려 했지만, 갑옷의 무게와 지형의 어려움으로 인해 지쳐서 움직임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언덕 위에서 날아오는 잉글랜드군의 화살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게 되었고, 프랑스 군대는 다시 한 번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이 전투는 크레시 전투의 악몽을 반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궁지에 몰린 장 2세는 최후의 결단을 내리기로 하였다. 그는 전투 중에 자신의 장갑을 잉글랜드 군에 건네며 자진해서 포로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는 중세 시대 전쟁에서 포로가 되는 것이 목숨을 구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장 2세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선택으로 인해 장 2세는 왕뿐만 아니라 왕자, 고위 귀족, 그리고 약 2천 명의 기사들까지 함께 포로가 되어 잉글랜드 군에 넘겨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대한 또 한 번의 대승을 거두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왕에 대한 잉글랜드 왕의 모든 봉건적 의무를 면제하고,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아키텐을 넘겨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대신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위를 포기한다고 명시했지만, 이는 명목상의 포기로 여전히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서 잉글랜드는 보르도를 포함한 아키텐 지방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브레티니 조약 체결 이후 잉글랜드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고, 당시 프랑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포로가 된 장 2세는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왕으로 대접받으며, 궁정도 차리고 신하들을 데려오는 등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잉글랜드 측은 장 2세의 몸값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 2세의 몸값은 300만 크라운에 해당하며, 이는 현대 시세로 약 6천억에서 7천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프랑스 왕실은 이 금액을 한꺼번에 지불할 수 없었고, 결국 장 2세는 선금을 지불하고 자신의 두 아들을 볼모로 맡긴 뒤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간 장 2세는 이 거액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왕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 금액을 마련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는 고민 끝에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 모든 사건은 중세 유럽의 전쟁 양상과 정치적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장 2세의 선택은 단순한 전투의 결과를 넘어, 전쟁의 흐름과 두 나라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갈등은 이렇게 다시 한 번 심화되었고, 이후의 전투와 정치적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얽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전쟁의 본질과 인간의 선택이 어떻게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