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두 군대는 1356년 9월 다시 피할 수 없는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흑태자가 이끄는 군대는 약 7천 명 정도였고, 프랑스의 왕 장 2세가 이끄는 군대는 그 두 배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장 2세는 아버지 필립 6세의 패배를 기억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술에 변화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보병 중심의 전술을 선택하고 말에서 내려서 전투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결정은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군은 이번에도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프랑스 군이 언덕에 오르기 위해서는 습기를 머금은 진창을 지나야 했습니다. 기사들은 기사도의 정신으로 적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갑옷의 무게와 지형의 어려움 때문에 결국 지쳐버렸습니다. 잉글랜드의 화살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프랑스 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게 되었고, 전투는 다시 한 번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궁지에 몰린 장 2세는 최후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투 중에 자신의 장갑을 잉글랜드 군에 건네며 자진해서 포로가 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는 중세 시대에서 포로가 되는 것이 목숨을 구하는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으로 인해 장 2세는 왕뿐만 아니라 왕자, 고위 귀족, 그리고 약 2천 명의 기사들까지 함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프랑스에 대한 또 한 번의 대승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프랑스 왕에 대한 잉글랜드 왕의 모든 봉건적 의무를 면제하고,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아키텐을 넘겨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대신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위를 포기하되, 여전히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브레티니 조약 체결 이후 잉글랜드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고, 당시 프랑스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장 2세는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왕으로 대접받으며, 궁정도 차리고 신하들을 데려오는 등 상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 측은 장 2세의 몸값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장 2세의 몸값은 300만 크라운에 해당하며, 이는 현대 시세로 약 6천억에서 7천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이 금액을 한꺼번에 지불할 수 없었고, 결국 장 2세는 선금을 지불하고 자신의 두 아들을 볼모로 맡긴 뒤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돌아간 장 2세는 이 거액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왕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 금액을 마련하는 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고민 끝에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장 2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샤를 5세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샤를 5세는 잉글랜드에 빼앗겼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는 뛰어난 전략가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고, 병약하던 샤를 5세는 42세의 나이로 일찍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의 아들인 샤를 6세가 왕위에 오르지만, 문제는 이 인물이 미치광이 왕이었다는 것입니다.
샤를 6세는 왕위에 오른 후 심각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그는 20대에 접어들면서 자기 몸이 유리로 만들어졌다고 믿으며, 목욕도 거부하고 5개월 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는 등 기행을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의 통치가 불가능해지며, 프랑스는 대내외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혼란의 틈을 타 권력을 잡은 세력은 바로 샤를 6세의 숙부인 부르고뉴 공작과 그의 측근들이었습니다.
부르고뉴 세력이 왕을 대신해 프랑스를 쥐락펴락하던 중, 정권의 실세였던 부르고뉴 공작이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의 측근들은 이 암살을 프랑스 왕실의 음모로 믿었고, 미치광이 왕 대신 권력의 실세로 등장한 부르고뉴 파는 잉글랜드와 손을 잡게 됩니다. 이러한 카오스 속에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5세라는 강력한 왕이 등장하게 됩니다.
헨리 5세는 잉글랜드가 아직 받지 못한 장 2세의 몸값을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프랑스를 침공하게 됩니다. 1415년 아쟁쿠르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헨리 5세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어서 그는 4년 뒤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까지 함락시키며 프랑스를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이때 헨리 5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운명을 바꿀 하나의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 조약은 바로 트로와 조약입니다.
트로와 조약의 내용은 프랑스의 왕 파리 6세의 딸과 잉글랜드의 왕 헨리 5세가 결혼하여 태어날 왕자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공동왕이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는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7세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샤를 7세는 미치광이 왕 샤를 6세의 아들로 왕위를 이을 예정이었지만, 트로와 조약으로 인해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